JOURNAL

POLÈNE SEOUL

LEATHER INTO SPACE

GAROSU

/

2026

공간 관찰·해석 | KAIROS DESIGN

POLÈNE SEOUL

가죽은 어디까지 공간이 될 수 있을까

파리의 선, 우브리케의 손,
그리고 서울의 은행나무가 만난 곳

POLÈNE SEOUL 공간 이미지

가로수길을 지날 때마다

이 건물 앞에서는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무엇을 파는 곳인지 몰라도,

딱딱한 건물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01

낯선 매장에서
다시 시작된 오래된 대화

이 공간을 설계한 WGNB 백종환 대표님은 삼성물산 패션부문 SI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도산의 준지 프로젝트 때문에 회사에서 자주 뵈었다. 그때는 고 마영범 고문님도 함께 계셨다.

지금 블로그의 ‘생각나눔’ 카테고리를 만들고 계속 유지하는 것도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좋은 공간을 함께 보고, 생각을 나누던 시간이 내게 오래 남았다.

고문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쪽 가슴이 먹먹하다.

살아 계셨다면 이곳에서 무엇을 가장 오래 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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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브랜드는 파리에서,
가방은 우브리케의 손에서

폴렌느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브랜드가 아니다. 2016년 파리에서 세 남매가 시작한 프랑스 가죽 브랜드다.

다만 가방이 실제로 태어나는 곳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산간 도시 우브리케(Ubrique) 다. 폴렌느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원피 입고부터 재단, 봉제, 검수와 출고까지 모든 과정이 약 5km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작은 반경 안에 1,300명이 넘는 장인의 손이 모여 있다.

POLÈNE SEOUL 공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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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옆에 놓인 브랜드 북.

좋은 브랜드는 무엇을 만들었는지만큼 왜 만드는지를 기록해둔다.

문단의 경계까지 가죽 조각처럼 나뉘어 있다.

내용과 편집이 같은 언어를 쓴다.

현장에서 들은 설명으로는 카멜, 테라코타, 회갈색처럼 차분한 가죽 색에도 우브리케의 토양과 산이 가진 색감이 스며 있다.

유행표에서 고른 색보다

만드는 장소에서 건너온 색은 오래 간다.


03

주름을 따라갔더니
주름보다 큰 원리가 보였다

처음에는 이 브랜드의 핵심이 ‘주름’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에도, 파사드 하단에도, 거울과 가구에도 접히고 휘어지는 선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더 보니

주름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핵심은 가죽의 유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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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GNB는 거대한 가죽 한 장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 광물성 덩어리를 가르고, 바닥과 벽, 천장과 계단으로 이어진다는 상상에서 공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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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곳은 가방의 모양을 크게 확대해 놓은 매장이 아니다. 가방을 만드는 재료가 어떻게 휘고, 접히고, 감싸는지를 건축으로 옮긴 매장이다.

브랜드를 닮게 하는 쉬운 방법은

상품의 모양과 로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더 깊은 방법은

그 상품을 가능하게 한 원리를 공간으로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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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기둥을 감싼 면에는 매끈함과 거침, 절단면처럼 서로 다른 마감이 쓰였다. 색은 비슷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표정이 달라진다. 가죽의 앞면과 뒷면, 잘린 단면을 다른 건축 재료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곡선은 창가 단차까지 이어지고, 거리의 빛을 실내 깊숙이 끌어들인다.
곡선은 창가 단차까지 이어지고, 거리의 빛을 실내 깊숙이 끌어들인다.
다리를 지운 캔틸레버 쇼케이스. 가구를 벽의 일부로 만들어 제품 주변의 시각적 소음을 줄였다.
다리를 지운 캔틸레버 쇼케이스. 가구를 벽의 일부로 만들어 제품 주변의 시각적 소음을 줄였다.

04

서울이라는 글자 없이
서울을 넣는 방법

거친 돌과 옅은 목재, 가죽의 차분한 색이 겹친 2층.
거친 돌과 옅은 목재, 가죽의 차분한 색이 겹친 2층.

글로벌 브랜드가 지역성을 보여주려 할 때 전통 문양이나 상징물을 먼저 꺼내기 쉽다. 폴렌느 서울은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서울을 장식으로 붙이지 않고,

가로수길에 이미 있던 나무를 안으로 들였다.

창밖 가로수 은행나무와 마주 보는 임정주 작가의 은행나무 가구
창밖 가로수 은행나무와 마주 보는 임정주 작가의 은행나무 가구

이 가구는 ‘한국적’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유리 밖 풍경과 연결되는 순간, 왜 이 매장에 있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가죽처럼 보이지만 도자기다. 이다솔 작가는 가죽의 결을 다른 재료로 다시 만들었다.
가죽처럼 보이지만 도자기다. 이다솔 작가는 가죽의 결을 다른 재료로 다시 만들었다.
가죽처럼 보이지만 도자기다. 이다솔 작가는 가죽의 결을 다른 재료로 다시 만들었다.
가죽과 돌 사이에 놓인 식물의 곡선. 정제된 공간이 너무 굳지 않게 숨을 넣는다.
가죽과 돌 사이에 놓인 식물의 곡선. 정제된 공간이 너무 굳지 않게 숨을 넣는다.

좋은 현지화는 낯선 상징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장소에 이미 있던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다.


05

남은 조각을 숨기지 않고
가장 앞에 세웠다

폴렌느가 사용하는 가죽은 가방을 만들기 위해 별도로 사육한 동물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 공식 자료에 따르면 식품 산업에서 발생한 원피를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인증된 태너리에서 가공한다.

매장에서 맡은 향도 흔히 떠올리는 강한 가공 냄새와는 달랐다. 가까이 갔을 때 은은한 가죽 향이 남는 정도였다.

2층 상설 공방. 완성품 뒤에 가려져 있던 도구와 손의 시간을 매장 안으로 꺼냈다.
2층 상설 공방. 완성품 뒤에 가려져 있던 도구와 손의 시간을 매장 안으로 꺼냈다.
공방의 체어까지 감고 엮는 방식이 이어진다. 작업 공간도 매장의 문법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공방의 체어까지 감고 엮는 방식이 이어진다. 작업 공간도 매장의 문법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자투리 가죽으로 레더 플라워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환경을 생각합니다’라는 문장보다 실제 도구와 손의 움직임이 더 오래 믿음을 준다.

재단 뒤 남은 조각은 버려지는 대신 꽃의 잎이 된다.
재단 뒤 남은 조각은 버려지는 대신 꽃의 잎이 된다.
구슬처럼 보이지만 가죽이다. Solé는 가죽 잔재로 만든 240개의 펄을 120개의 매듭으로 엮는다.
구슬처럼 보이지만 가죽이다. Solé는 가죽 잔재로 만든 240개의 펄을 120개의 매듭으로 엮는다.

특히 Solé 가방은 설명을 듣고 다시 보게 되었다. 현장에서는 더 이상 재단하기 어려운 작은 가죽 잔재를 분쇄하고 성형해 조약돌 모양의 펄로 만든다고 했다.

재활용은 보통 남은 것을 덜 보이게 만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폴렌느는 남은 것을 제품의 가장 눈에 띄는 표정으로 바꿨다.


06

곡선은 눈보다
몸이 먼저 이해했다

가방의 곡면이 허리선을 따라 붙어 몸과 가방 사이의 빈틈을 줄인다.
가방의 곡면이 허리선을 따라 붙어 몸과 가방 사이의 빈틈을 줄인다.

가방을 직접 메어보니 유려한 곡선은 사진을 위한 장식만은 아니었다. 몸 가까이 자연스럽게 감기고, 걸을 때 가방이 따로 흔들리는 느낌이 적었다.

인체공학은 어려운 설명이 아니라

몸이 먼저 “편하다”고 말하게 하는 디자인에 가깝다.

고객을 마주하는 카운터와 뒤쪽 포장대를 분리해 응대 면을 깨끗하게 유지한다.
고객을 마주하는 카운터와 뒤쪽 포장대를 분리해 응대 면을 깨끗하게 유지한다.

07

브랜드의 마지막 재료는 사람

이 매장을 오래 보게 만든 것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오픈 때부터 함께했다는 선지현 매니저님은 제품을 권하기 전에 브랜드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가죽이 어떻게 공간이 되었으며, 서울의 작가들이 무엇을 더했는지 먼저 들려주셨다.

좋은 브랜드에는 자신을 설명하는 책이 있고,

좋은 매장에는 그 책을 손님의 언어로 펼쳐주는 사람이 있다.

밝고 친절한 안내 덕분에 따로 보였던 장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공간을 아는 사람이 공간을 설명해주니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레더 플라워의 도구와 재활용 과정을 차분히 설명해주신 공방 담당자분께도 감사드린다.

같은 공간도 누가 어떻게 맞아주느냐에 따라

잠깐 둘러본 매장이 되기도 하고, 오래 기억할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EPILOGUE

한 장의 가죽을 대하는 태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외관 때문에 들어갔다.

나올 때 남은 것은 한 장의 가죽을 대하는 태도였다.

가죽을 접어 가방을 만들고,

그 성질을 펼쳐 공간을 만들고,

남은 조각에는 다음 쓰임을 주었다.


KAIROS DESIGN —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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