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NOSTALGIA DOUBLE JAE

WHERE MANY HANDS MEET ONE PERSON’S LONGING

BUKCHON

/

2026

NOSTALGIA DOUBLE JAE · SPACE ESSAY

노스텔지어 더블재

WHERE MANY HANDS MEET ONE PERSON’S LONGING

여러 사람의 손이 한 사람의 그리움에 닿기까지

노스텔지어 더블재의 공간과 협업을 담은 대표 이미지

NOSTALGIA DOUBLE JAE · BUKCHON

블루재에서 시작된,
거꾸로 흐르는 마음

블루재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더블재의 마지막 문턱을 나설 때까지,
한 생각이 계속 따라왔다.
이곳은 다시,
누구와 함께 오고 싶은가.

두 곳을 같은 날 차례로 촬영했고, 돌아와 블루재 글을 먼저 올렸다. 얼마 뒤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여기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

그 말은 낯설기보다 오래 울렸다. 현장을 걷는 내내 나 역시 같은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공간을 보고, 그 안에 함께 있고 싶은 얼굴을 떠올리는 방향으로.

보통은 사람이 먼저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장소를 고른다. 그런데 노스텔지어의 두 집에서는 순서가 거꾸로 흘렀다. 공간이 먼저 도착했고, 그 뒤를 사람이 따라왔다. 좋은 공간을 보았을 뿐인데 그 안에 아직 오지 않은 한 사람의 자리가 먼저 생겼다.

북촌 골목에서 바라본 노스텔지어 더블재
북촌팔경 5경의 시작점에 자리한 더블재. 붉은 담의 모서리를 따라 대문에 이른다. 1북촌팔경 5경의 시작점에 자리한 더블재. 붉은 담의 모서리를 따라 대문에 이른다. 2
북촌팔경 5경의 시작점에 자리한 더블재. 붉은 담의 모서리를 따라 대문에 이른다.

01 · 공간이 먼저 건넨 질문

협업은 필요한 감각을
정확히 부르는 일이었다

리뉴얼 전과 후. 이미 두 채를 잇고 있던 복도는 구조를 유지한 채, 빛과 재료를 새로 입으며 머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더블재 안내책자 발췌 사진) 1리뉴얼 전과 후. 이미 두 채를 잇고 있던 복도는 구조를 유지한 채, 빛과 재료를 새로 입으며 머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더블재 안내책자 발췌 사진) 2
리뉴얼 전과 후. 이미 두 채를 잇고 있던 복도는 구조를 유지한 채, 빛과 재료를 새로 입으며 머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더블재 안내책자 발췌 사진)

더블재는 ㅡ자와 ㄱ자, 서로 다른 두 가옥이 맞붙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이 처음 던진 질문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둘을 하나처럼 지우지 않고, 어떻게 함께 살게 할 것인가.

노스텔지어가 오래된 한옥을 오늘의 문화적 경험으로 바꾸는 일을 해왔다면, 윤현상재는 재료의 물성을 읽고 서로 다른 작업을 한 장면으로 큐레이팅해 왔다. 그래서 이 협업은 완성된 집에 작품을 얹는 방식으로는 성립하기 어려웠다. 집이 먼저 필요를 말하고, 그 필요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손이 설계 초기부터 불려와야 했다.

두 집의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 이어야 한다. 낮은 서까래 앞에서 가구는 몸을 낮춰야 한다. 작은 정원은 어느 방에서도 자연의 기척을 건네야 한다. 한지와 옻칠, 제주 흙과 볏짚은 옛 재료의 표본이 아니라 지금의 손에 닿는 감각이 되어야 한다.

더블재의 크레딧은 이름의 목록이 아니라 이 질문들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때 비로소 살아난다.

윤현상재의 기획은 두 집의 차이를 없애는 대신 그 사이에 복도를 놓았다. 복도는 어느 한 채의 방이 아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에 양쪽을 오가며 관계를 만든다. 안마당과 사랑마당도 그 길의 양옆에서 서로 다른 숨을 고른다.

두 채를 잇는 이해용 동선도. 붉은 선은 방 이름을 가리지 않고 두 정원과 복도 사이의 흐름만 보여준다.
두 채를 잇는 이해용 동선도. 붉은 선은 방 이름을 가리지 않고 두 정원과 복도 사이의 흐름만 보여준다.

02 · 함께 걷는 속도

두 채를 잇는 데에는
길을 오래 생각한 회사가 필요했다

대문 안쪽의 전이 공간과 안마당.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바깥의 속도가 줄어든다.
대문 안쪽의 전이 공간과 안마당.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바깥의 속도가 줄어든다.

대문을 지나고, 다시 문을 통과하고, 작은 단차를 넘는다. 먼저 간 사람이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높이다. 더블재의 동선은 한 사람을 빠르게 목적지로 보내기보다, 여러 사람이 같은 장면에 도착할 때까지 걸음의 차이를 조금씩 줄인다.

이 집이 필요로 한 것은 경계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었다. 여닫이와 미닫이문, 방과 차실의 높낮이로 관계의 농도를 조절하고, 그 사이를 한 방향으로 묶어 줄 바닥이 필요했다.

그래서 30여 년간 마루 한길을 걸으며 나뭇결과 옹이, 색과 폭이 만드는 차이를 다뤄 온 지복득마루가 떠오른다. ‘천천히 가되, 다르게 가라’는 태도는 두 채의 다름을 서둘러 평평하게 만들지 않는 더블재의 방식과 닮았다. 복도와 같은 방향으로 길게 뻗는 마루는 시선을 다음 방으로 보내고, 차실에서는 대청의 패턴으로 바뀌어 걸음을 앉음으로 전환한다.

마루는 자신을 전시하지 않는다. 대신 발바닥 아래에서 두 집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알려 준다. 한 사람이 앞서가면 다른 사람이 같은 나뭇결을 따라온다. 더블재가 지복득마루를 필요로 한 이유는 고급 목재 때문만이 아니라, 바닥을 ‘함께 가는 방향’으로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방 2의 바닥 높이와 문턱. 단차는 칸막이 없이도 공간의 성격을 나눈다.
방 2의 바닥 높이와 문턱. 단차는 칸막이 없이도 공간의 성격을 나눈다.

03 · 오래 곁에 남는 풍경

정원은 크게 보이기보다
오래 곁에 있어야 했다

안마당과 사랑마당. 크기는 작지만 대부분의 실과 맞닿아 있다.
안마당과 사랑마당. 크기는 작지만 대부분의 실과 맞닿아 있다.

이 작은 터가 필요로 한 것은 집을 압도하는 한 번의 장면이 아니었다. 거실에서도, 복도에서도, 방의 작은 창에서도 계속 곁에 나타날 자연이었다. 그래서 식물 한 포기의 성질과 계절의 변화를 오래 관찰하고, 사람이 만든 티보다 ‘스스로 그러한’ 풍경을 탐구해 온 이대길스튜디오가 이 자리에 맞는다.

그가 잘하는 것은 식물로 강한 중심을 만드는 일보다, 건축의 가장자리마다 자연이 머물 틈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더블재의 두 정원도 작지만 대부분의 실과 맞닿는다. 가까이 심고 낮게 드리운 식물은 방을 가리지 않으면서 시선의 끝을 받아 준다. 계절과 빛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장면을 만들되 집보다 먼저 말하지 않는다.

공간의 필요에서 거꾸로 읽으면 선택의 이유가 보인다. 이 집은 멀리 감상할 조경보다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자주 공유할 풍경을 필요로 했다. 한 사람은 거실에, 한 사람은 복도에 있어도 같은 나무의 다른 면을 본다. 정원은 둘 사이에서 말없이 안부를 건넨다.

면적은 작지만 건축과 맞닿는 길이는 길고, 자연을 마주치는 횟수는 많다. 더블재의 정원은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사람의 곁을 오래 따라간다. 좋은 관계가 대개 그러하듯이.

창 하나가 정원을 액자처럼 잘라낸다. 같은 정원도 함께 보는 사람의 자리마다 다른 장면이 된다.
창 하나가 정원을 액자처럼 잘라낸다. 같은 정원도 함께 보는 사람의 자리마다 다른 장면이 된다.

04 ·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치수

집은 가구에게
자신을 낮춰 달라고 부탁했다

스탠다드에이가 제작한 거실 가구와 붙박이 와인장. 낮고 긴 비례가 한옥의 수평선을 따른다.
스탠다드에이가 제작한 거실 가구와 붙박이 와인장. 낮고 긴 비례가 한옥의 수평선을 따른다.

낮은 서까래와 오래된 수평선 앞에서 이 집은 가구의 개성을 크게 외치지 않았다. 대신 자신과 같은 높이로 목소리를 낮춰 달라고 부탁했다.

‘기준을 지키는 디자인’과 오래 쓰는 원목 가구를 추구해 온 스탠다드에이는 정답 같은 기성품보다 공간에 맞는 첫 기준을 세우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침대 헤드보드는 평소보다 낮아졌고, 오크 프레임의 소파는 장식을 덜어 긴 수평선만 남겼다. 목재의 단정한 결 위에 크바드라트 패브릭의 촉각과 색을 얹어, 단단한 구조가 몸에 닿는 자리에서는 부드러워지게 했다.

안방의 캐리어 랙과 벤치는 좌식 생활이 낯선 손님이 어디에서 짐을 풀고 몸을 쉬게 할지를 먼저 상상한다. 와인장도 병을 꺼내고 잔을 고른 뒤 누군가 있는 자리로 옮겨가는 순서를 품는다. 가구가 치수를 맞춘 대상은 방만이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의 망설임과 행동이었다.

낮은 서까래 아래에 맞춘 침실 가구와 욕실. 가구가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한옥의 높이를 배운다.
낮은 서까래 아래에 맞춘 침실 가구와 욕실. 가구가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한옥의 높이를 배운다.

05 · 작품보다 먼저 있었던 행위

식탁과 차실은 ‘작품’보다
‘사이’를 필요로 했다

식사 공간과 차실에 무엇이 필요했을까. 벽 앞에서 감탄하게 하는 조각보다, 서로 마주 앉고 차를 건네고 음식을 나누게 하는 구조였을 것이다. 이 자리는 명사를 진열하기 전에 ‘앉다, 내다, 나누다’라는 동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 공간과 주방, 차실. 가구·타일·조명·마루가 서로를 앞세우지 않고 한 장면의 온도를 맞춘다.
식사 공간과 주방, 차실. 가구·타일·조명·마루가 서로를 앞세우지 않고 한 장면의 온도를 맞춘다.

그 필요에 ‘사유와 명상을 위한 가구’를 말해 온 이로재오브젝트의 수도사 작업대와 의자가 불려왔다. 목재만으로 맞물리는 결구는 부재 하나가 다른 부재를 밀어내지 않고 서로의 힘을 받아야 선다. 간결한 형태는 식탁을 조각으로 세우기보다 사람들을 같은 높이에 앉힌다. 가구의 구조 자체가 협업의 태도를 보여 주는 셈이다.

차실에는 전통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필요의 필요’만 남긴 소목을 고민해 온 방석호 작가가 맞았다. 차 테이블과 도구함, 사랑마당의 평상은 화려한 장식을 덜어내고 열고, 놓고, 건네고, 나란히 앉는 동작을 정교하게 받친다. 소박하지만 빈약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손의 순서를 놓치지 않는다.

강영준 작가가 분청의 자유로운 표현을 오늘의 다관으로 옮긴 ‘모란다관’도 같은 이유로 차실에 들어온 듯하다. 백토의 일부를 긁어 배경을 물리고 문양을 남기는 방식은 모든 면을 채우지 않아야 한 송이가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차를 따르는 순간 작품의 여백은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이 된다.

작업대는 몸을 마주 보게 하고, 차 테이블은 두 손 사이에 시간을 놓고, 평상은 누군가의 옆자리를 남긴다. 이들이 선택된 이유는 아름다운 가구여서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06 · 재료가 품고 있던 시간

‘겹’의 집은
시간이 겹쳐지는 재료를 불렀다

더블재가 말하는 ‘겹’은 평면의 두 채에만 있지 않았다. 종이 위로 옻이 스미고, 흙이 불을 지나 색을 얻고, 볏짚이 여러 번 꼬여 형태가 되는 과정에도 같은 구조가 있었다. 윤현상재가 재료와 작가를 선택한 논리는 닮은 색을 맞추는 데 있지 않고, 이 집의 본질을 각기 다른 물성으로 반복하는 데 있었다.

더블재에 적용된 유남권 작가의 옻칠 한지

유남권 작가는 종이로 만든 바탕에 옻을 여러 번 스미게 하는 지태칠기로 거친 표면 위에 자신만의 ‘겹’을 쌓는다. 가볍고 약해 보이는 한지가 칠의 시간만큼 깊고 단단해지는 작업이다. 그래서 그의 옻칠 한지는 족욕채와 주방의 배경에 단순한 마감재로 놓이지 않는다. 오래된 집을 없애지 않고 오늘의 시간을 덧입힌 더블재의 태도를 재료 한 장 안에서 반복한다.

그 표면은 빛이 많다고 잘 보이는 재료가 아니다. 검고 붉은 발색, 광택과 거친 결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정확히 분리해 줄 빛이 필요했다. ‘조명기구가 아니라 빛’을 우선하고 사람의 지각을 중심에 두는 에르코가 대문과 주방, 차실에 불린 이유다. 에르코의 빛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단차에는 깊이를, 옻칠에는 색을, 나무에는 온기를 돌려준다. 협업자가 다른 협업자를 잘 보이게 만드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벽은 흙의 출신과 불의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안마당의 제주 흙 옹기 타일과 외부의 붉은 벽돌. 같은 수평선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이 겹친다.
안마당의 제주 흙 옹기 타일과 외부의 붉은 벽돌. 같은 수평선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이 겹친다.

안마당의 긴 벽에는 제주 구좌의 화산회토를 다루며 전통 제주옹기의 오늘 쓰임을 고민해 온 김경찬 작가의 옹기 타일이 놓였다. 옹기를 그릇으로 복제하는 대신 건축의 피부로 바꾼 선택이다. 김주일의 제작 컨설팅을 거친 타일은 불을 통과한 흙마다 조금 다른 갈색과 표정을 남긴다. 똑같이 찍힌 제품보다 서로 다른 조각이 긴 수평선 안에서 함께 버틴다.

이 벽에 옹기 타일이 어울리는 이유는 ‘한국적’이라는 이름 때문만이 아니다. 오래된 담을 흉내 내지 않으면서도 흙과 불, 손의 편차를 숨기지 않아 시간이 더해질 자리를 남기기 때문이다.

외부의 돈덕전 복원 벽돌과 안마당의 옹기 타일은 과거를 복제하지 않고, 서로 다른 출신의 재료가 오늘 한 집의 경계를 만드는 법을 보여 준다.

볏짚은 장식이 아니라 생활의 기억으로 들어왔다

더블재 거실에 놓인 황정화 작가의 토종 볏짚 작업

거실의 낮은 테이블 위에는 황정화 작가의 토종 볏짚 작업이 놓여 있다. 그는 짚을 낡고 거친 옛 물건으로 남겨 두지 않고, 구조를 이해해 거스러미를 다듬고 오늘의 실내에 맞는 쓰임으로 바꾸어 왔다. 논과 마당, 농가의 노동을 품은 재료가 깨끗한 현대 공간 안에서도 자신의 출신을 잃지 않게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볏짚은 더블재의 ‘향수’를 가장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손으로 꼰 결을 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가의 이름보다 그 재료를 만지며 살았을 사람들의 시간이다. 공간을 보며 한 사람을 떠올리는 이 글의 감정이, 이미 재료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었다.

더블재에 놓인 공예 작품과 재료의 세부

한지의 섬유를 찢고 꼬아 낯선 몸으로 세우는 고소미의 작업, 전통 생활 문화를 연구하고 오늘의 쓰임을 실험해 온 온지음의 협력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전통을 형태로 복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금의 몸과 빛과 생활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더블재가 이들을 필요로 한 이유는 오래된 것을 잘 아는 동시에, 오래된 것을 현재형으로 바꿀 줄 알았기 때문이다.


07 · 아직 끝나지 않은 협업

이름이 아니라
다음 사람을 생각한 방식이 남았다

욕실의 작은 가구와 철물, 침실 수납. 더블재의 협업은 눈높이보다 손높이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1욕실의 작은 가구와 철물, 침실 수납. 더블재의 협업은 눈높이보다 손높이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2
욕실의 작은 가구와 철물, 침실 수납. 더블재의 협업은 눈높이보다 손높이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더블재의 작품은 벽에 걸린 채 감상을 기다리지 않는다. 마루는 다음 걸음을, 조명은 다른 재료의 색을, 정원은 떨어져 있는 두 시선을, 가구는 아직 오지 않은 몸의 높이를 생각했다. 손잡이는 열리기를, 도구함은 차를 준비하기를, 평상과 벤치는 누군가 옆자리를 내어주기를 기다린다.

이것이 이 집의 협업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논리다. 각자가 가장 잘하는 일을 과시하지 않고 다음 사람의 작업과 행동이 가능해지도록 썼다. 마루의 방향이 가구의 위치를 만들고, 가구의 낮은 높이가 정원의 시야를 살리며, 빛이 옻칠의 깊이를 꺼내고, 작은 철물이 사용자의 손을 그 장면 안으로 들인다. 어느 하나도 혼자서는 지금의 감정을 완성할 수 없다.

손이 닿고, 몸이 기대고, 차 한 잔의 시간이 표면에 쌓일 때 투숙객은 완성된 공간의 관람객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어온 작업의 마지막 참여자가 된다. 집을 만든 손들의 끝에 머무는 사람의 손이 이어진다. 그래서 더블재의 협업은 준공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집에 손을 보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만든 더 큰 결과는 도면에도 크레딧에도 다 적히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 재료를 고르고 빛을 맞추고 손의 높이를 헤아린 판단들이 마침내 한 사람의 그리움에까지 닿았다는 것.


EPILOGUE · 더블재의 ‘둘’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다시 사람을 불러냈다

더블재의 공간과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의 장면

돌이켜보면 이 생각은 더블재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블루재의 첫 문턱에서 시작되어 두 집의 마루와 정원, 복도를 건너 더블재의 마지막 문턱까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서로 다른 표정의 두 한옥은 같은 질문을 남겼다. 이 장면을 누구와 나누고 싶은가. 그 질문은 먼저 올린 글을 건너 다른 사람에게 도착했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공간이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공간을 꿈꾸는 작은 순환이었다.

더블재를 만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크게 남기기보다 다음 사람의 자리를 남겼다. 한 회사가 두 채를 잇는 바닥의 방향을 만들고, 한 정원사가 떨어진 시선을 같은 나무에 머물게 했다. 한 가구 제작자는 아직 오지 않은 몸의 높이를 재었고, 공예가들은 종이와 흙, 짚과 금속 안에 시간과 손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빛은 그 모든 작업이 제 목소리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좋은 공간을 만났을 때 함께 보고 싶은 사람으로 떠오르는 것. 공간을 설명하는 사람을 넘어, 그 공간의 여백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언젠가 다시 이 문을 열게 된다면 오래 설명하지 않을 것 같다. 함께 걷고, 같은 창으로 정원을 보고, 각자의 속도로 머문 뒤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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