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K-ROUTE MYEONGDONG

A walk through cafés, art and brand spaces, tracing the quiet details that stay with us.

MYEONGDONG

/

2026

MYEONGDONG

명동에서 읽은 공간의 시간


CONTENTS / WALKING ORDER

한 걸음씩 이어지는 명동

​

01 카페 가무

02 신세계 더 헤리티지

03 루이비통 비저너리 저니

04 서관면옥

05 리이 RE RHEE

06 코오롱스포츠

07 명동길 38


오늘의 걸음을 지도 위에

가무 → 신세계 세 공간 → 리이 → 코오롱스포츠


01 / CAFE GAMU

가무의 창은

옆집의 계절을 빌린다

카페 가무 4층. 명동의 번화함 너머로 중국대사관의 나무가 보인다.

이 번화가 한가운데서, 창밖이 어떻게 이렇게 초록일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옆 중국대사관의 나무들이었다. 잎이 가장 넉넉하게 들어오는 자리는 4층 창가였다.

​

1972년 문을 연 가무는 비엔나커피로 알려진 오래된 카페다. 낡은 소파와 나무 천장 사이로 들어온 초록 덕분에, 오래된 실내가 계절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

공간의 넓이를

도면 안에서만 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이 창은 자기 땅 밖의 풍경까지

한 잔의 시간 안으로 데려왔다.


02 / THE HERITAGE / BAHK SEON GHI

숯과 함께 바라본 것은

와이어였다

박선기 《공간의 기원》. 떨어져 있는 숯 사이로 집의 골격이 떠오른다.

신세계 더 헤리티지에 들어서자, 불에 탄 한옥이 공중에서 다시 일어선 것 같았다. 실제 화재 현장을 복원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숯으로 한옥의 골격을 구성한 작업 앞에서, 내가 먼저 떠올린 장면이었다.

​

숯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조금 물러서면 기둥과 보가 이어졌다. 눈은 빈틈을 건너 하나의 집을 읽었다. 게슈탈트 지각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 어쩌면 여백은 관객이 공간을 완성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

박실장님은 숯의 무게에 따라 와이어의 굵기도 다르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숯보다, 거의 보이지 않는 선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공간을 설계할 때 모든 타카핀과 피스의 굵기와 길이를 도면에 담지는 않는다. 필요한 상세와 현장에서 결정할 몫을 나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지지선 하나까지 개별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

​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 디터 람스, 좋은 디자인의 여덟 번째 원칙을 옮김

​

보이지 않는다고 덜 설계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지하는 것이 물러나야,

우리가 보여주려던 것이 온전히 드러났다.


02.1 / DRAWING / GRAIN / SHADOW

공중에 놓인

수묵화와 타고 남은 결

숯의 크기와 위치를 다룬 드로잉

드로잉을 보니 큰 숯에서 작은 숯까지, 하나씩 자리를 얻고 있었다. 가까운 것은 진하게, 먼 것은 흐리고 옅게. 내 눈에는 공간을 그린 수묵화 한 점처럼

​

가까이 본 숯에는 예상과 다른 윤기가 있었다. 가루 날림이나 운반 중 손상을 줄이려 코팅했을까. 확인하지 못한 추측이지만, 재료를 고르는 일과 그 재료가 전시를 견디도록 돌보는 일이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 깊이에 따라 드러나는 판재의 결

다음 방에서는 불에 그을린 얇은 판들이 겹쳐 있었다. 전시 소개에 따르면 합판을 태운 작업이다. 나무가 가공된 판이 되고 다시 불을 거친다는 순환이, 재료 자체에 남아 있었다.

​

합판의 결은 층마다 방향이 바뀐다. 탄 깊이가 달라지자 아래층의 다른 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여러 경험을 통과한 사람은, 상황이 달라질 때 꺼내어 쓸 수 있는 결이 많아진다.

빛이 가려지는 자리가 겹치며 짙어지는 바닥의 명암.

바닥에서는 그림자가 겹친 곳이 더 짙게 보였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음예예찬』에서 사물 사이에 생기는 명암으로 아름다움을 읽었던 시선이 떠올랐다.

​

재료 하나의 색만으로는 이 농담을 만들 수 없다.

간격과 빛, 다른 재료와의 관계까지가

그 재료의 표정이었다.


02.2 / GARDEN / TWO MATERIALS

정원에서 만난 두 가지 시간

더 헤리티지 정원. 녹빛 철과 반사하는 스테인리스가 서로 다른 표정을 만든다.

​

정원에는 두 금속 조형이 서 있었다. 한쪽은 주변을 비추고, 다른 한쪽은 녹빛을 머금고 있었다. 같은 철 계열의 재료라도 시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랐다.

​

작품 소개는 철과 스테인리스로 만든 이 조형들을, 숯에서 금속으로 확장되는 작가의 재료 탐구 안에 놓는다. 수직으로 이어진 형태는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다른 풍경을 만든다.

​

거울 같은 표면에는 지금의 정원이 지나가고, 녹빛 표면에는 변해온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나는 순간을 비추고, 하나는 시간을 쌓는 것처럼.

​

준공 사진 속 재료는 언제나 가장 새롭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쓰는 공간은 그 사진 이후에 시작된다.

​

설계할 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더 생겼다.

이 재료는 오늘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03 / LOUIS VUITTON / VISIONARY JOURNEYS

루이비통은 역사를

안내하는 사람까지 설계했다

아카이브를 따라 이동하는 도슨트 투어

루이비통 비저너리 저니에서는 최대 다섯 명으로 예약한 소규모 도슨트 투어에 참여했다. 설명하시는 분이 아이패드로 예시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자료를 꺼내는 타이밍도, 눈앞의 전시와 연결하는 방식도 무척 능숙했다.

​

설명을 잘 듣고 있다는 느낌보다, 점점 더 잘 보게 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 차이가 감동이었다.

​

브랜드의 공식 소개는 이곳을 여행과 창조성을 중심으로 문화, 식음, 리테일이 만나는 공간으로 설명한다. 실제 동선에서도 오래된 트렁크와 만드는 손, 음악과 협업의 장면이 이어졌다.

​

아카이브는 브랜드가 해온 일을 보여주고, 손의 작업은 그 시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협업은 그 역사가 오늘의 취향과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내게는 이것이 이 공간의 마케팅으로 읽혔다.

​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역사가 전달되지는 않는다. 관람객이 이해할 순서와, 그 사이를 이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

좋은 도슨트는 눈앞의 물건에 맥락을 더한다.

그 맥락을 이해한 뒤에는 같은 가방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

가무가 창으로 이웃의 풍경을 들였다면,

이곳은 이야기를 통해

브랜드 밖에 서 있던 사람을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04 / SEOGWAN MYEONOK

서관면옥에서

잠시 시선을 내려놓다

신세계 본점 14층 서관면옥 / 육회와 여러 고명이 담긴 한 그릇

점심은 신세계 본점 14층 서관면옥에서 먹었다. 평양냉면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이날은 육회와 여러 고명이 올라간 밥을 골랐다. 맛있었다.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은행 전경도 좋았다.

​

전시에서 재료의 결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잠시 멀리 두었다. 잘 본 하루에도,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고 밥을 먹는 시간이 필요했다.


05 / RE RHEE

리이 앞에서 겹쳐진 시대를 보다

리이는 네이버지도에 영업 중으로 떠 있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아쉬워서 바깥을 더 오래 보았다. 디딤돌과 기와, 서양의 고전기둥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가 한 장면에 겹쳐 있었다.

​

기둥을 감싼 표면은 플렉스 같은 현대 소재처럼 느껴졌다. 정확한 재료나 고전 오더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요소들이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

설계자 WASUD의 설명을 찾아보니, 1933년 건물에 남은 조적벽과 증축 구조, 음식점 시절 더해진 기와까지 존중한 작업이었다. 처음부터 순수한 한 가지 양식의 집이었던 것은 아니다.

​

위층의 돌출된 마루 같은 부분에서는 사랑채 누마루가 떠올랐다. 공개된 소개는 2층을 ‘안채의 쪽마루’처럼 구성했다고 설명한다. 문이 닫힌 날의 관찰에, 다음 방문을 위한 단서가 더해졌다.

​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어느 한 시점으로 되돌리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

이미 겹쳐진 시간에,

오늘의 한 겹을 조심스럽게 보태는 일.


06 / KOLON SPORT

코오롱스포츠에서 돌이 말해주는 것

거친 돌의 표면 / 통나무와 금속 상판이 만나는 진열대

코오롱스포츠에서는 몸이 먼저 산을 떠올렸다. 돌과 거친 콘크리트, 통나무가 매장 곳곳에 있었다. 나무의 단면과 돌의 요철은 매끈한 옷감 곁에서 더 선명해졌다.

​

코오롱스포츠는 등산학교 같은 프로그램으로 실제 야외 활동과 브랜드를 연결해온 곳이다. 매장의 재료도 그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이 옷을 어디에서 입게 될지, 긴 설명 없이 상상하게 했다.

​

특히 통나무가 상판을 받치는 장면이 좋았다. 자연을 사진 속 배경으로 두는 대신, 물건을 받치고 공간을 구성하는 역할을 맡겼다.

​

재료가 브랜드를 대신 설명할 때, 인테리어와 상품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돌이 옆에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돌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였다.

​

아침에 본 가무의 나무는 창밖에 있었다.

마지막 매장의 나무는 실내에서 물건을 받치고 있었다.

같은 자연도 공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이 되었다.


07 / MYEONGDONG GIL 38

명동길 38에서 내 시간도 만났다

좌측 필자가 공사한 2013년 티니위니 매장, 우측 현재 2026년 9월 16일 공사중인 모습

이날의 명동에서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이 하나 더 있다. 명동예술극장 맞은편, 명동길 38의 공사 중인 매장이었다.

2013년, 필자가 티니위니 매장을 공사했던 자리다. 이후 아이더 샤모니 매장으로 바뀐 모습도 보았는데, 지금은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는 듯했다.

​

그때의 공정과 현장, 완성된 매장을 바라보던 마음이 잠깐 돌아왔다. 내게는 아직 한 장면으로 남아 있는 공간에서, 도시는 계속 다음 일을 하고 있었다.

​

가무는 이웃의 나무를 창에 담았고, 박선기의 집은 빈틈 속에서도 이어졌다. 브랜드들은 각자의 시간을 공간으로 들려주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는 내가 지나온 시간도 만났다.

​

명동 K루트는 새로운 공간을 구경한 하루이면서, 내가 공간을 만드는 이유를 다시 생각한 하루였다.

​

언젠가 내가 만든 매장의 이름이 바뀌더라도,

그곳에서 누군가 보낸 좋은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

​

​

KAIROS DESIGN — SEOUL

© 2026 KAIROS 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