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K-ROUTE HANNAM

HANNAM ROUTE

HANNAM

/

2026

공간 관찰·해석 | KAIROS DESIGN

K-ROUTE

한남에서 해방촌까지

리움·남산·신흥시장,

자리를 옮기면 같은 하루도 다르게 보인다

그날은 이상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날이었다.


ACTUAL ROUTE MAP

00

한남에서

해방촌까지 K-루트

한남동의 전시·식사 구간을 지나 남산 보행 구간으로 연결하고,

해방촌 신흥시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흐름.

한남 구간은 장소들이 가깝게 모여 있어 짧은 이동이 반복되고, 낫배드커피 이후부터는 경사와 계단이 섞인 산책이 시작된다. 지도에서 길어지는 한 줄이, 이날의 분위기가 바뀌는 지점이기도 했다.


ONE DAY, EIGHT SCENES

목차

01

123 젤라또 한남점

차가운 디저트와 음악으로 시작한 첫 장면

02

페이스갤러리 서울

빛과 각도가 관점을 바꾸는 곳

03

리움미술관 · 티노 세갈

비어 있는 방에서 안과 밖이 뒤집힌 순간

04

리움 로비 · 로렌스 위너

가깝고도 먼 거리의 문장

05

《다른 공간 안으로》

생각을 내려놓고 몸으로 들어간 전시

06

난포 한남 · 낫배드커피

전시 뒤의 밥과 커피,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

07

남산 산책

높이가 바뀌자 도시의 표정이 바뀌었다

08

신흥시장 · 노가리공장

오래된 시간을 지우지 않은 밤


123 GELATO · HANNAM

01

하루의 첫 장면은

차가운 것이었다

보통 이런 날은 커피숍에서 만난다.

그런데 이날은 젤라또였다.

123젤라또 한남점은 작은 매장인데도 첫인상이 꽤 빠르다. 천장을 거의 한 장의 확산광처럼 밝히고, 스테인리스 카운터와 유리 쇼케이스를 길게 놓았다. 따뜻한 우드톤 카페와는 반대로 차갑고 반사되는 재료가 많다. 그래서 젤라또의 색과 사람의 움직임이 더 또렷해진다.

주문하는 동안에는 직원의 손과 콘, 토핑, 메뉴가 한 시야에 겹쳤다. 가리는 것보다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이 좁은 공간에서는 기다리는 시간까지 매장의 장면이 된다.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다.

공간의 크기는 벽으로 정하지만, 공간의 속도는 소리가 정하기도 한다.

이곳은 오래 앉아 쉬기보다 “이제 어디로 갈까” 하는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PACE GALLERY · MARY CORSE

02

작품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계속 달라졌다

페이스갤러리 서울로 들어가는 길은 바로 흰 전시장으로 꽂히지 않는다. 검은 벽돌, 유리 난간, 데크와 계단 사이로 밖의 나무가 계속 끼어든다. 매스스터디스가 설계한 이 건물은 여러 중정과 외부 공간을 품고 있다. 전시를 보기 전에 한 번 호흡을 바꾸게 만드는 구조다.

Mary Corse, 《Primary Light》 전시에서

메리 코스의 다이아몬드 회화 앞에서는 그 호흡이 더 느려졌다.

정면에서 보았던 파랑과, 한 걸음 옆으로 옮겨 본 파랑이 같지 않았다.

코스는 아크릴 물감에 미세한 유리 구슬을 섞어 빛을 반사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표면이 스스로 색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빛과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보낸다. 작품은 제자리에 있는데 관람자가 움직일수록 그림이 달라진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색감

만질 수도, 비출 수도 없다면

내가 움직여야 한다.

각도를 바꾸고, 높이를 낮추고,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일.

이해도 비슷할지 모른다.

대상을 바꾸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리를 옮기는 데서 시작되는 것.


PETER ALEXANDER · PARTICULATES OF COLOR

빛은 물체의 표면이 아니라

사이에서 생겼다

같은 형태도 빛이 통과하면 다른 밀도를 가진다

그 그림자 까지도

피터 알렉산더 작품은 반대로 빛을 품고 있는 물체처럼 보였다.

투명한 레진 안에서 파랑과 오렌지가 깊어졌다가 가장자리에서 옅어졌다. 가까이 가면 물체이고, 몇 걸음 물러나면 색의 덩어리였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Light and Space 흐름을 이끈 알렉산더는 빛과 색이 지각되는 관계를 오래 탐구했다. 그래서 작품을 “무슨 색인가”라고 묻는 것보다 “어디서 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생각은 머리에서만 바뀌지 않았다.

몸을 반걸음 옆으로 옮겼을 뿐인데, 같은 물체가 다르게 보였다.

그 정도의 물리적인 변화가 오히려 더 설득력 있었다.


LEEUM · TINO SEHGAL

03

비어 있는 방이 밖이 되는 순간

리움에서는 티노 세갈의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을 만났다. 그는 작품을 물건으로 남기지 않는다. 사람의 몸과 언어, 노래와 움직임, 관객과의 우연한 조우가 작품이 된다. 그래서 이 전시는 사진보다 기억에 의존하게 된다.

중앙에서는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여러 방이 이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은 잠시 둘러보다가 “여긴 뭐지, 아무것도 없네” 하는 얼굴로 다시 나오곤 했다.

나도 처음에는 방 안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다 한 번, 방 안쪽에서 중앙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그 순간 방은 ‘안’이 아니라

밖을 바라보기 위한 자리가 되었다.

건축에서 창과 문은 단지 통과하는 구멍이 아니다. 무엇을 보게 할지 결정하는 프레임이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 오히려 시선을 바깥으로 밀어내자, 중앙의 행위가 갑자기 또렷해졌다. 작가가 그 의미를 의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날 나는 그렇게 보았다.


LAWRENCE WEINER

04

가깝고도 먼,

그리고 언젠가는

리움 로비에서 만난 로렌스 위너의 언어 작업

로렌스 위너(1942–2021)는 문장을 재료처럼 다룬 개념미술의 중요한 작가다. 돌이나 철 대신 언어를 벽과 건축 위에 놓고, 관람자가 그 문장을 자기 경험 속에서 다시 완성하게 만든다.

“가깝고도 먼

그리고 언젠가는 같은 거리에 있을.”

그날은 묘하게 이 문장이 오래 남았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말하는 문장 같았지만,

나는 그보다 보는 위치와 시간의 거리를 생각했다.

같은 문장도 그날과 지금은 다르게 읽힌다.

그때는 몇몇 장면이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지금 돌아보면 이상하게 담담하다.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번뿐이어서 더 선명하게 남은 것들이 있다.


다른 공간 안으로

05

생각을 내려놓자

몸이 먼저 웃었다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작품을 바라보는 전시라기보다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전시에 가깝다. 리움의 설명처럼 이 ‘환경(environment)’ 작업은 빛, 색, 소리, 공기, 움직임을 몸으로 경험할 때 완성된다.

몇 분 전까지 우리는 비어 있는 방과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벽은 통로가 되고, 빛은 색칠한 표면이 아니라 공간의 온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전시는 해석의 대상이라기보다 놀이터에 가까워졌다.


JUDY CHICAGO · FEATHER ROOM

잠시 초등학생이 되었다

주디 시카고의 〈Feather Room〉은 둥근 흰 방을 수많은 거위 깃털로 채운다. 리움 전시에서는 약 136kg의 깃털이 사용됐다. 단단한 벽과 바닥을 만들어 온 건축의 재료 감각과 정반대편에 있는, 가볍고 부드럽고 통제하기 어려운 재료다.

들어갈 때는 다들 조심했다.

그러다 누군가 깃털을 한 번 크게 날렸고, 그다음부터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어른 몇 명이 정말 초등학생처럼 놀았다.

사진 속에서는 누가 무슨 고민을 갖고 왔는지 알 수 없다.

하얀 깃털이 옷과 머리에 붙어 있고, 다들 웃고 있을 뿐이다.

좋은 공간은 가끔

사람이 잠깐 자기 나이를 잊게 한다.


NANPO · NOT BAD COFFEE

06

전시가 길어지면

몸이 먼저 현실을 찾는다

깃털방을 나오고 나니 배가 고팠다.

생각을 많이 한 날에도 결국 밥은 먹어야 한다.

난포 한남에서 식사를 하고, 낫배드커피 한남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 구간은 굳이 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좋았다. 전시에서 받은 자극을 바로 다음 정보로 덮지 않고, 잠시 가라앉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난포 한남

좋은 동선에는 장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는 시간도 하나쯤 필요하다.

낫배드커피 한남

그리고 커피를 다 마신 뒤, 우리는 한남동의 골목을 빠져나와 남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부터 하루의 속도가 다시 바뀌었다.


NAMSAN WALK

07

길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장면을 건넜다

남산길에는 오래된 큰 나무들이 이어졌다. 그늘이 길게 생기고, 자동차 소리는 한 발씩 멀어졌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자 아까 전시장에서 하던 이야기들도 조금씩 다른 결로 바뀌었다.

걷는 동안 누군가 “일본이 떠날 때 다시 돌아오려고 큰 은행나무를 남겨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확인된 역사 자료로는 찾기 어려운, 도시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래된 나무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생겨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은 오래된 것 앞에 서면 그 시간을 그냥 두지 못한다.

무언가의 사연을 붙여 기억하려 한다.


HAEBANGCHON · SHINHEUNG MARKET

08

새것으로 덮지 않아도

젊어질 수 있다

1953 신흥시장.

입구부터 오래된 건물의 시간이 그대로 보인다

남산을 넘어 신흥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풍경이 또 바뀌었다.

붉은 벽돌, 오래된 콘크리트, 노출된 전선과 배관, 새로 달린 조명과 네온, 작은 테이블들이 한 골목 안에 겹쳐 있었다.

보통 리모델링은 오래된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려 한다. 이곳은 반대다. 배관과 케이블, 거친 천장과 벽돌을 남긴 채 그 사이에 새 간판과 조명, 가구를 얹었다. 그래서 신흥시장의 매력은 “옛날 같아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이 한 프레임 안에 있기 때문에 생긴다.

새로운 공간은 새 재료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은 시간 안으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도 생긴다.

노가리 공장

맥주잔 위로 시장의 전구가 흔들렸다.

페이스갤러리의 파랑, 리움의 하얀 깃털, 남산의 초록, 신흥시장의 붉은 네온.

하루 동안 본 색들이 맥주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상하게 한날의 기억으로 섞였다.

돌아보면 장소는 계속 바뀌었는데 하루는 끊기지 않았다.

작품 앞에서는 내가 움직여야 보였고, 비어 있는 방에서는 밖을 보아야 했고, 남산에서는 높이가 달라지자 도시가 달라졌다.

신흥시장에서는 오래된 것을 지우지 않아도 새로운 저녁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하루를 오래 기억하게 하는 건 완벽한 계획보다, 서로 다른 장면 사이를 직접 걸어본 거리인지도 모른다.


KAIROS DESIGN —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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