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K-ROUTE CHEONGGYESAN
CHEONGGYESAN ROUTE
CHEONGGYESAN
/
2026
K-ROUTE | KAIROS DESIGN
청계산 옥녀봉,
등산 같은 피크닉
바람이 음악이 되던 숲
2026. 06. 13
옥녀봉과 이름 없는 숲 사이
사람이 거의 없는 길에서는
앞사람의 걸음이 곧 이정표가 된다.
한 가지 질문
K-ROUTE는
길을 알려주는 것일까,
경험이 바뀌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일까.
함께 청계산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다른 산행을 제안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길로 들어가
나무 사이 경사와 바위 구간을 지나
정상에 오른 뒤,
등산로를 벗어나야 만날 수 있는
숲 깊숙한 평지에서 피크닉을 하는 길.
지도에서도
숲으로만 어렴풋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음식을 펼치고
작은 숲속 청음회까지 해보자고 하니
모두 재미있겠다며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의
‘등산 같은 피크닉’ 이
시작됐다.
01
이름부터
조금 위험한 피크닉
멤버중 지인은 모임 이름을 듣더니 “등신 같은 피크닉 아니냐”고 놀렸다고 한다.
다소 탐험이 필요한 피크닉 장소라, 혹시 못 찾기라도 하면 정말 말이 씨가 될 것 같아 은근히 신경이 곤두섰다.
출발 장소가 익숙하지 않아 몇 사람이 늦었다. 기다리는 동안 옆의 벤치에서 쉬기로 했는데, 들어가는 길목의 좁은 구조물이 뜻밖의 첫 미션이 됐다.
몸이 가벼운 사람은 틈을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리를 찾아왔다. 한 명씩 도착할 때마다 같은 장면이 반복됐고 그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산에 오르기도 전에,
계획에 없던 아이스브레이킹이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사람들이 모이자 한 명씩 모기 기피제를 뿌렸다. 산행보다 피크닉을 염두에 둔 준비였다. 몇 시간 뒤 숲속에 자리를 깔았을 때, 벌레 때문에 음악을 끊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꽤 중요한 설계였음을 알게 됐다.
출발 전,
서로 다른 손이 먼저 하나의 원을 만들었다
02
청계산의
옆문으로 들어가다
보통 청계산 하면 원터골의 가게와 계단, 익숙한 등산 행렬을 떠올린다. 이날 선택한 시작점은 그 표정과 달랐다. 화원과 밭, 비닐하우스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낮은 굴다리로 들어갔다.
화원과 밭, 비닐하우스 사이.
산은 아직 멀어 보였다.
도시의 마지막 빛을 등지고 낮은 연결통로를 지난다.
굴다리는 짧았지만 역할은 분명했다. 밝은 바깥에서 어둠으로, 다시 녹색으로.
건축에서 이런 구간을 전이 공간이라 부른다. 목적지보다 먼저 몸의 속도를 바꾸는 곳이다.
덩굴이 벽을 덮자 사람이 만든 경계는
조금씩 자연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산은 입구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도시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우리를 안쪽으로 데려갔다.
03
길이 사람의
속도를 바꾼다
숲이 시작되자 계단보다 경사면이 많아졌다. 길은 넓었다가 가늘어지고, 흙길은 어느 순간 바위 능선으로 바뀌었다. 등산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앞사람의 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발밑의 돌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빛은 길 위에 점으로 떨어졌다.
나무가 만든 천장은 계속 움직였다
도시에서는 대화가 사람의 속도를 만든다.
산에서는 지형이 속도를 정한다.
빠른 사람은 바위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늦은 사람은 앞사람이 남긴 자리를 따라 올라왔다.
누구도 “맞춰 걷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보폭은 조금씩 비슷해졌다.
반듯한 계단이 없으니 손과 발이 함께 길을 읽는다.
좋은 길은 사람을
빨리 보내지 않는다.
서로를 기다릴 이유를 만든다.
04
네 개의 의자와
정상에서의 한마디
내 큰 가방에는 접이식 의자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준비할 때는 네 사람의 쉼을 챙긴다고 생각했는데, 오르막에서는 네 사람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옥녀봉에서 가방을 내려놓자 멤버가 한 번 들어보더니 말했다. “와, 무겁네.” 나는 웃으며 답했다. “이제 체크해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제야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들고 왔다. 누군가는 의자와 돗자리, 술까지 챙겼고, 누군가는 간식을 나눴다. 여성 멤버 중 무거운 짐을 군말 없이 들고 온 분도 계셨다. 산에서는 말보다 배낭이 먼저 성격을 보여준다.
옥녀봉. 정상 사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 위로 펼쳐진 나무였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단체사진을 찍었다. 정상은 도착의 증거였지만, 그날의 일정에서는 중간 지점에 가까웠다.
진짜 목적지는 내려가는 길에서 따로 빠져나와야 했다.
05
등산로 밖에서
숲이 방이 되는 순간
옥녀봉에서 양재 쪽으로 내려오다 익숙한 등산로를 벗어났다. 길은 금세 희미해졌다.
움푹 팬 계곡 지형을 건너고, 낙엽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비탈을 조심스럽게 지나야 했다.
내려가는 길부터 작은 탐험이 시작됐다.
길이 사라진 곳에서는
앞사람보다 지형을 먼저 보아야 했다.
그리고 갑자기 경사가 풀렸다. 사방은 나무로 감싸였고 가운데에는 제법 넓은 평지와 잔디가 남아 있었다. 좁고 어두운 계곡을 지난 뒤 넓은 빈터가 열리니, 숲이 스스로 문을 열어준 것처럼 느껴졌다.
건축하지 않았는데
방처럼 느껴지는 이유
바닥은 잔디, 벽은 짙은 숲, 천장은 겹겹의 잎이었다. 주변은 감싸고 가운데는 열려 있어 안쪽에서는 안정감과 개방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환경심리학에서 말하는 ‘전망과 피신(prospect-refuge)’의 조건과도 닮았다. 몸을 숨길 수 있는 가장자리와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열린 면이 함께 있을 때 사람은 편안함을 느낀다.
한쪽에는 청계산에서 혼자 다른 시간을 살아온 듯한 큰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었다. 두 팔로 안아도 절반밖에 감기지 않았다.
내가 나무를 안은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내가 안겨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보다 굵은 소나무와 또 다른 빈터도 있다. 하지만 모든 비밀을 한 번에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에 다시 걸을 이유로 남겨두었다.
06
바람이
음악이 되던 청음회
돗자리를 펴고 의자를 꺼냈다. 빵과 간식, 작은 잔과 술병이 가운데 모였다.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질 즈음, 피크닉은 준비한 사람들의 합보다 조금 더 큰 장면이 되었다.
한 사람의 준비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이 가운데 놓였다.
숲이 사방을 감싸자 작은 돗자리
하나가 잠시 우리의 거실이 됐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각자의 신청곡을 받았다. 그 순간부터 숲은 조용한 배경이 아니었다.
새소리는 곡 사이의 빈칸을 채웠고, 바람은 잎의 높이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냈다.
음악을 틀었는데,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시작될 때 정말로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몇 사람이 눈을 감았다.
노래는 스피커에서 나왔지만, 그날의 곡을 완성한 것은 머리 위의 잎과 그 사이를 지나간 공기였다.
이어 카더가든의 〈그대 작은 나의 세상이 되어〉가 흘렀다. 제목처럼, 둥글게 앉은 작은 자리가 잠시 우리만의 세계가 되었다. 아무도 다음 일정을 재촉하지 않았다.
숲은 음악을
방해하지 않았다.
음악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07
웰니스라는
말을 붙이기 전
돌아보면 그날 한 일은 단순했다. 걸었고, 기다렸고, 바위를 넘었고, 음식을 나눴고, 한 곡을 끝까지 들었다. 거창한 시설도 프로그램도
그런데 몸의 감각은 분명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지각한 사람과 짐의 무게가 보였고, 숲에 들어서자 발밑의 돌과 앞사람의 등이 보였다. 정상에서는 성취가, 빈터에서는 안도감이, 음악이 흐를 때는 바람과 새소리가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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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OUTE · 경험의 순서 낯선 진입 → 함께 걷기 → 바위 구간의 몰입 → 정상의 성취 → 숨은 평지의 발견 → 음식과 음악 → 일상으로 돌아오기 웰니스는 시설보다 몸과 마음의 속도를 바꾸는 순서에서 시작된다. |
공간을 기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좋은 장면 하나보다 그 장면에 도착하기까지의 순서가 중요하다.
낮은 굴다리, 나무가 만든 긴 경사, 바위 능선, 정상, 다시 내려가는 비탈과 갑자기 열린 잔디밭.
청계산은 이동과 멈춤을 번갈아 배치하며 감각을 깨웠다.
웰니스는
몸을 관리하는 일이기 전에,
사람의 속도가
자연의 속도와 맞아지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08
숲에서 식탁까지,
부안애서
자리를 정리하고 양재 방면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각자 떨어져 걷던 사람들이 마지막 계단에서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손을 흔들었다.
숲의 마지막 계단.
오늘의 길이 끝났다는 것을 손으로 먼저 알렸다.
주차한 사람들은 차를 가져오고, 나머지는 택시를 나눠 타고 미리 예약해 둔 청계산입구역 쪽 ‘부안애서’로 이동했다.
숲의 바람이 아직 옷자락에 남아 있는데, 차가운 잔들이 식탁 가운데로 먼저 모였다.
산에서 맞춘 보폭이,
부안애서에서는 하나의 건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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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청계산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정상 사진이 아니었다.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서두르지 않던
몇 분.
바람이 먼저 잎을 흔들고,
그다음 음악이 들렸다.
아마 우리의 웰니스는
그 순서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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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OS DESIGN | K-ROUTE
익숙한 도시의 옆길에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경험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