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GRAPHIC HANGANG

While the Pages Turned, the View Changed Too

SEOUL

/

2026

책장을 넘기는 동안

창밖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목차

프롤로그 익숙한 배 뒤에 숨은 공간

01 한강을 바라보는 몸의 높이

02 책의 단면에서 떠오른 인연

03 붙잡을 수 없어서 오래 바라본 색

04 밤이 되자 가까워지는 것들

05 취향이 누군가의 하루가 될 때

그날의 노을에서 시작한 카페 시안


익숙한 배 뒤에 숨은 공간

10월 9일, 한글날 연휴가 시작되는 오후 두 시.

길에서 배를 보았을 때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

그래픽이라는 상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한강변을 지날 때마다

보아왔던 배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

달라진 것은 그 뒤에 있었다.

​

두 배 사이를 잇는 통로

익숙한 배 너머에, 또 한 척의 배가 숨어 있었다.

앞의 배가 마치 전실이 된 듯했다.

​

오래 보아온 풍경을 지나 통로를 건너야

비로소 그래픽 한강에 닿을 수 있었다.

도착한 사람에게 건네는 차

웰컴티를 받아 들고 나니,

조금 전 길에서 보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

늘 보아온 풍경에도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이가 있었다.

​

해가 진 뒤

낮에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생각은 한 번 더 깊어졌다.


01 한강을 바라보는 몸의 높이

1층의 긴 테이블 / 2층에서 내려다보는 홀

​

1층의 긴 테이블에서는 책 너머로 한강이 펼쳐진다.

​

2층에서는

조금 전 내가 머물던 홀과 그 안의 사람들이

풍경이 된다.

​

빈백에 몸을 기대면

시선이 낮아지고,

창에 담긴 하늘의 비율이 달라진다.

​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강과 나 사이의 거리가 새로 정해졌다.

​

공간을 설계하며 자주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될까 하는 질문이다.

​

창을 크게 내는 것만으로

풍경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

앉는 높이와 몸이 향하는 방향,

시선을 가리는 난간 하나까지

창밖의 한강을

어떤 장면으로 받아들일지 결정한다.

2층 바의 테라스 / 하늘이 넓어지는 루프탑

로비와 사물함, 피자와 웰컴티, 등대가 있는 부두.

​

바와 테라스를 지나면

하늘을 넓게 받아들이는 루프탑이 있고,

아래층에는 명상과 요가를 위한 공간이 있다.

​

책에 몰입하다가 바람을 쐬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고요해질 수 있다.

​

처음에는 익숙한 배 뒤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다.

​

이제는 자리를 옮기고 시간을 보내며,

그 안에 겹쳐진 풍경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02 책의 단면에서 떠오른 인연

손에 든 책과 붉은 음료 / 함께 앉아 각자의 페이지를 읽는 오후

​

이날 손에 든 책은

안그람의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

​

낯선 상상 속에서

관계와 상처를 다루는 다섯 편의 단편만화다.

​

초록색 표지 곁에는 붉은 음료가 놓였다.

​

책 속으로 들어갔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한강이 있었다.

​

이곳에서는 독서의 중간에

풍경을 읽는 시간이 끼어든다.

이태원 그래픽 파사드 (유랩 홈페이지 이미지 사용)

​

책을 보다가 그래픽 이태원의 외벽이 떠올랐다.

겹겹이 쌓인 종이의 단면을 건물의 표면으로 옮긴 곳.

​

건축은 오온,

공간 디자인은 유랩으로 소개되어 있다.

​

책을 읽는 공간이,

멀리서 보면 한 권의 책처럼 기억된다는 점이 좋았다.

​

유랩과는 삼성물산 패션 SI팀에서 일하던 시절,

에이세컨즈 가로수점 리뉴얼로 협업한 인연이 있다.

당시에는 재료의 개발과 구현에 이토록 깊이 들어가는 팀인지 미처 몰랐다.

​

시간이 지나 그 작업을 다시 보니,

함께 일했던 기억도 조금 다르게 읽힌다.

​

머릿속의 개념을

실제로 만질 수 있는 표면까지 밀고 가는 일.

​

현장을 겪어본 사람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판단과 수고가 필요한지 안다.

​

나는 그 과정에 한국적인 재료와 정서가

자연스럽게 스미기를 바란다.

​

서로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가까움을 느끼는 이유다.


03 붙잡을 수 없어서 오래 바라본 색

낮의 루프탑. 천막 아래로 햇빛과 그림자가 나뉜다.

​

낮의 루프탑에서는

푸른 하늘과 천막 아래의 그늘이 또렷했다.

​

해가 기울자 그 경계가 느슨해졌다.

시선은 어느새 공간의 생김새를 지나,

하늘에 번지는 색에 머물렀다.

​

붉은 셀로판지를 햇빛에 비춰보았을 때의 빛.

​

그날 한강의 노을은 그 기억에 가까웠다.

짙은데도 속이 비치는 붉음이었다.

​

한 가지 색으로 부르기에는,

바라보는 동안에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

책은 덮어두었다가 다시 펼칠 수 있지만

이 하늘은 지금을 지나면 다시 펼칠 수 없었다.

해가 저무는 동안, 자꾸만 눈을 떼기 어려웠다.


04 밤이 되자 가까워지는 것들

​

낮에는 창과 천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홀 전체를 하나로 묶었다.

​

밤이 되자 테이블 위의 작은 등들이

사람들의 자리를 드러냈다.

​

같은 홀인데도,

함께 온 사람의 얼굴과 펼쳐놓은 책이

더 가까워 보였다.

​

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공간의 친밀함은 달라질 수 있었다.

도시의 불빛을 마주하는 밤의 창가

​

어두워진 창은 바깥 풍경에

실내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

안쪽을 지나치게 밝히면,

보고 싶었던 야경은 유리의 반사 뒤로 물러난다.

​

책을 읽는 손 가까이에는 빛이 필요하고,

한강을 향한 시선 앞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

어디를 밝힐 것인가만큼,

어디에 어둠을 남길 것인가.

​

이곳의 밤은 설계할 때

오래 붙들어야 할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

2층 바와 루프탑에는 디제잉이 이어진다.

​

낮에 각자의 책으로 흩어졌던 시간이,

음악 속에서 느슨하게 이어진다.

​

한 장소에 오래 머물렀는데도

하루가 여러 겹으로 남았다.

​

책장을 넘기는 동안,

창밖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05 취향이 누군가의 하루가 될 때

​

오후 두 시 입장료는 4만 원.

처음에는 선뜻 가볍게 느껴지는 금액은 아니었다.

​

그날은 자정까지 머물 수 있었고,

위스키를 제외한 메뉴에 쓸 수 있는

바우처 한 장이 포함됐다.

​

잠시 외출할 때는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오면 됐다.

​

책과 음료, 여러 층의 공간을

하나씩 헤아리던 마음은 저녁이 되며 달라졌다.

​

나를 포함해 함께 간 다섯 명 모두,

4만 원이 아깝지 않다는 데 마음이 같았다.

​

이곳에서 누린 것은

해가 지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볼 여유였다.

​

늘 곁에 있는 한강 앞에서,

그만큼 오래 앉아 있었던 날이 얼마나 됐던가.

​

그래픽은 서로 다른 만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브랜드다.

​

정다운 매니저의 과거 인터뷰에도,

어른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취향을

키워갈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

한강점에서는 그 취향이

타인의 하루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았다.

​

누군가 애써 모은 책을 처음 펼치는 사람,

음악을 듣다가 고개를 돌려 노을을 발견하는 사람.

​

좋아하는 것을 이만큼 나누기 위해

공간을 만든 이들에게 고마웠다.

​

내게는 서울에 건네는

문화적 헌정처럼 느껴졌다.

​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를 내어주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좋아할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

밤이 깊자 건너편 도시의 불빛이

한강의 잔물결을 따라 길어졌다.

​

낮부터 바라본 한강이었다.

그 사이에 책 한 권과 음악, 노을이 겹쳐졌다.

​

익숙한 서울에,

다시 떠올리고 싶은 하루가 하나 더 생겼다.


그날의 노을에서 시작한 카페 시안

그날의 붉음을 공간에 옮긴다면,

색보다 빛이 통과하는 방식을

먼저 생각하고 싶었다.

​

한국 창호의 반복과 낮은 마루에서 출발해,

투명 유리 사이에 색유리를 세웠다.

​

빛이 기울수록 바닥의 붉은 면은 길어지고,

목재와 석재 위에서 서로 다른 깊이를 얻는다.

​

같은 자리에 다시 앉아도,

어제와 다른 장면을 만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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