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는 동안
창밖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목차
프롤로그 익숙한 배 뒤에 숨은 공간
01 한강을 바라보는 몸의 높이
02 책의 단면에서 떠오른 인연
03 붙잡을 수 없어서 오래 바라본 색
04 밤이 되자 가까워지는 것들
05 취향이 누군가의 하루가 될 때
그날의 노을에서 시작한 카페 시안
익숙한 배 뒤에 숨은 공간
10월 9일, 한글날 연휴가 시작되는 오후 두 시.
길에서 배를 보았을 때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픽이라는 상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한강변을 지날 때마다
보아왔던 배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달라진 것은 그 뒤에 있었다.
익숙한 배 너머에, 또 한 척의 배가 숨어 있었다.
앞의 배가 마치 전실이 된 듯했다.
오래 보아온 풍경을 지나 통로를 건너야
비로소 그래픽 한강에 닿을 수 있었다.
웰컴티를 받아 들고 나니,
조금 전 길에서 보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늘 보아온 풍경에도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이가 있었다.
해가 진 뒤
낮에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생각은 한 번 더 깊어졌다.
01 한강을 바라보는 몸의 높이
1층의 긴 테이블에서는 책 너머로 한강이 펼쳐진다.
2층에서는
조금 전 내가 머물던 홀과 그 안의 사람들이
풍경이 된다.
빈백에 몸을 기대면
시선이 낮아지고,
창에 담긴 하늘의 비율이 달라진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강과 나 사이의 거리가 새로 정해졌다.
공간을 설계하며 자주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될까 하는 질문이다.
창을 크게 내는 것만으로
풍경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앉는 높이와 몸이 향하는 방향,
시선을 가리는 난간 하나까지
창밖의 한강을
어떤 장면으로 받아들일지 결정한다.
로비와 사물함, 피자와 웰컴티, 등대가 있는 부두.
바와 테라스를 지나면
하늘을 넓게 받아들이는 루프탑이 있고,
아래층에는 명상과 요가를 위한 공간이 있다.
책에 몰입하다가 바람을 쐬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고요해질 수 있다.
처음에는 익숙한 배 뒤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다.
이제는 자리를 옮기고 시간을 보내며,
그 안에 겹쳐진 풍경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02 책의 단면에서 떠오른 인연
이날 손에 든 책은
안그람의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
낯선 상상 속에서
관계와 상처를 다루는 다섯 편의 단편만화다.
초록색 표지 곁에는 붉은 음료가 놓였다.
책 속으로 들어갔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한강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독서의 중간에
풍경을 읽는 시간이 끼어든다.
책을 보다가 그래픽 이태원의 외벽이 떠올랐다.
겹겹이 쌓인 종이의 단면을 건물의 표면으로 옮긴 곳.
건축은 오온,
공간 디자인은 유랩으로 소개되어 있다.
책을 읽는 공간이,
멀리서 보면 한 권의 책처럼 기억된다는 점이 좋았다.
유랩과는 삼성물산 패션 SI팀에서 일하던 시절,
에이세컨즈 가로수점 리뉴얼로 협업한 인연이 있다.
당시에는 재료의 개발과 구현에 이토록 깊이 들어가는 팀인지 미처 몰랐다.
시간이 지나 그 작업을 다시 보니,
함께 일했던 기억도 조금 다르게 읽힌다.
머릿속의 개념을
실제로 만질 수 있는 표면까지 밀고 가는 일.
현장을 겪어본 사람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판단과 수고가 필요한지 안다.
나는 그 과정에 한국적인 재료와 정서가
자연스럽게 스미기를 바란다.
서로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가까움을 느끼는 이유다.
03 붙잡을 수 없어서 오래 바라본 색
낮의 루프탑에서는
푸른 하늘과 천막 아래의 그늘이 또렷했다.
해가 기울자 그 경계가 느슨해졌다.
시선은 어느새 공간의 생김새를 지나,
하늘에 번지는 색에 머물렀다.
붉은 셀로판지를 햇빛에 비춰보았을 때의 빛.
그날 한강의 노을은 그 기억에 가까웠다.
짙은데도 속이 비치는 붉음이었다.
한 가지 색으로 부르기에는,
바라보는 동안에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책은 덮어두었다가 다시 펼칠 수 있지만
이 하늘은 지금을 지나면 다시 펼칠 수 없었다.
해가 저무는 동안, 자꾸만 눈을 떼기 어려웠다.
04 밤이 되자 가까워지는 것들
낮에는 창과 천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홀 전체를 하나로 묶었다.
밤이 되자 테이블 위의 작은 등들이
사람들의 자리를 드러냈다.
같은 홀인데도,
함께 온 사람의 얼굴과 펼쳐놓은 책이
더 가까워 보였다.
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공간의 친밀함은 달라질 수 있었다.
어두워진 창은 바깥 풍경에
실내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안쪽을 지나치게 밝히면,
보고 싶었던 야경은 유리의 반사 뒤로 물러난다.
책을 읽는 손 가까이에는 빛이 필요하고,
한강을 향한 시선 앞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어디를 밝힐 것인가만큼,
어디에 어둠을 남길 것인가.
이곳의 밤은 설계할 때
오래 붙들어야 할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2층 바와 루프탑에는 디제잉이 이어진다.
낮에 각자의 책으로 흩어졌던 시간이,
음악 속에서 느슨하게 이어진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렀는데도
하루가 여러 겹으로 남았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창밖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05 취향이 누군가의 하루가 될 때
오후 두 시 입장료는 4만 원.
처음에는 선뜻 가볍게 느껴지는 금액은 아니었다.
그날은 자정까지 머물 수 있었고,
위스키를 제외한 메뉴에 쓸 수 있는
바우처 한 장이 포함됐다.
잠시 외출할 때는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오면 됐다.
책과 음료, 여러 층의 공간을
하나씩 헤아리던 마음은 저녁이 되며 달라졌다.
나를 포함해 함께 간 다섯 명 모두,
4만 원이 아깝지 않다는 데 마음이 같았다.
이곳에서 누린 것은
해가 지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볼 여유였다.
늘 곁에 있는 한강 앞에서,
그만큼 오래 앉아 있었던 날이 얼마나 됐던가.
그래픽은 서로 다른 만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브랜드다.
정다운 매니저의 과거 인터뷰에도,
어른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취향을
키워갈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한강점에서는 그 취향이
타인의 하루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았다.
누군가 애써 모은 책을 처음 펼치는 사람,
음악을 듣다가 고개를 돌려 노을을 발견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을 이만큼 나누기 위해
공간을 만든 이들에게 고마웠다.
내게는 서울에 건네는
문화적 헌정처럼 느껴졌다.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를 내어주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좋아할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밤이 깊자 건너편 도시의 불빛이
한강의 잔물결을 따라 길어졌다.
낮부터 바라본 한강이었다.
그 사이에 책 한 권과 음악, 노을이 겹쳐졌다.
익숙한 서울에,
다시 떠올리고 싶은 하루가 하나 더 생겼다.
그날의 노을에서 시작한 카페 시안
그날의 붉음을 공간에 옮긴다면,
색보다 빛이 통과하는 방식을
먼저 생각하고 싶었다.
한국 창호의 반복과 낮은 마루에서 출발해,
투명 유리 사이에 색유리를 세웠다.
빛이 기울수록 바닥의 붉은 면은 길어지고,
목재와 석재 위에서 서로 다른 깊이를 얻는다.
같은 자리에 다시 앉아도,
어제와 다른 장면을 만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