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ARARIO MUSEUM IN SPACE
TIME WITHIN ARCHITECTURE
JONGRO
/
2026
A R T?
카이로스 공간 디자인입니다.
오늘은 안국에 위치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다녀왔습니다. 단순한 전시 관람이 아니라, 한국 현대건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공간사옥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김수근 건축의 결이 살아 있는 구관, 유리사옥, 한옥이 서로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공간의 밀도와 흐름을 몸으로 걸으며 확인하고 왔습니다.
예술을 담는 그릇이 어떻게 또 하나의 작품이 되는지, 공간이 시간을 품으면 어떤 깊이를 갖게 되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 시간이 쌓이는 공간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란 유일한 예술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점하면서 갖게 되는 일회적 현존재성입니다. 아우라에는 시공간적 의미로서 진품성, 역사성, 전통성과 같은 개념이 공존합니다.
이 공간사옥에는 김수근이 6년 동안 직접 살며 지은 시간, 1970-80년대 한국 문화예술의 심장부였던 시간, 부도로 버려졌던 시간, 그리고 김창일 회장이 150억원을 들여 살려낸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음악에도 쌓이는 층위
동행자분께서 클래식 음악에 귀가 열리는 시점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고민을 나누셨습니다. 저는 이것도 벤야민이 말한 '의미의 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행자분 처럼 전공하며 쌓은 경험, 일반인들이 공연장에서 느낀 떨림, 우연히 들었던 선율... 이런 다층적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각자만의 방식으로 귀가 열리지 않을까 합니다. 음악도 건축처럼 높고 낮은 가운데 세밀하게 나누고 늘리고 좁히면서 오묘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스킵플로어(Skip Floor)란 무엇인가
공간사옥을 걸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축적 장치는 바로 스킵플로어(Skip Floor) 방식이었습니다.
일반 건물처럼 1층, 2층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반 층씩 높이가 변하는 구조입니다. 출입구에서 반 층을 올라야 안내데스크에 도착하고, 거기서 또 반 층을 올라가면 다음 공간이 나타납니다. 계단을 180° 방향전환하며 반 층씩 오르다 보면 "지금 몇 층이지?"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이는 지형을 따르는 한옥의 공간 개념을 현대 건축에 적용한 것입니다. 한옥에서 마당(지면) - 툇마루(0.5층) - 대청마루(1층) - 누마루(1.3층) - 다락(1.5층)처럼 층의 경계가 애매한 것처럼, 공간사옥도 22개의 서로 다른 높낮이 바닥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소한 대지(113.06m²)에서 최대한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김수근은 낮은 층고의 4~5개 층을 삽입했고, 그 결과 수직적 공간의 흐름이 수평적 움직임처럼 인지되는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냈습니다
김수근의 한옥 재해석 - 스킵플로어와 음악의 음계
김수근은 1967년 부여박물관에서 "일본 신사 같다"는 비판을 받은 후 5년 동안 한옥을 연구했고, 한옥의 외관이 아니라 공간적 개념을 이 건물에 녹였습니다.
스킵플로어는 단순히 공간 효율을 위한 기법이 아니라, 음악의 음계와 같은 건축적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도-레-미 사이에 도#, 레# 같은 반음이 있고, 그 미세한 조율이 감동을 만들듯, 이 건물의 반 층 단위 높낮이도 공간에 미묘한 변주를 부여합니다.
걷는 행위 자체가 공간을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됩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몇 층이지?"라는 질문보다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김수근이 추구한 '궁극공간(Ultimate Space)'의 핵심입니다.
왜 이런 동선인가 - '한 공간, 한 작가' 원칙
아라리오뮤지엄은 기존 공간의 용도나 구조에 맞추어 전시 작품을 선정하였으며, 한 공간에는 한 작가의 작품들만을 선보이는 것으로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김수근이 설계한 각 방은 원래 용도가 달랐습니다. 작은 사무실, 회의실, 편집실, 전시실... 그 공간의 크기와 성격에 맞는 작품을 배치한 것입니다. 좁은 방에는 강렬한 작품 하나를, 넓은 방에는 서사가 있는 작품을 배치했습니다.
관람객들은 크고 작은 공간들이 오밀조밀하게 얽혀있는 건물 내부를 삼각형과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며 마치 현대미술을 위한 미로를 탐험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스킵플로어 동선이야말로 김수근이 의도한 공간 경험의 핵심입니다.
주요 작품과 층위
<이동욱> (LEE Dongwook, 1976~) 은 스컬피(점토), 화석, 공산품 등을 재료로 손바닥만 한 작은 인간 형상을 만드는 조각가입니다. 시니컬하고 냉정한 시선을 유머스럽고 재치 넘치는 표현 방식으로 부드럽게 전달하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진지하고 무겁습니다. 통조림 통 속에서 깡통 형태대로 구겨진 채 쌓여있는 인간들의 형상처럼, 현대 사회 속 소외, 균형, 분열, 고립을 짚어냅니다.
이 작품에서 좁은 유리 상자와 유리병은 단순한 용기가 아닙니다. 투명하게 모든 것이 보이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시스템, 즉 현대 사회의 위계 구조 그 자체입니다. 줄에 매달린 머리는 권력자를, 매달린 남자 형상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를 가리키지만, 둘 모두 결국 줄에 묶여 있다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권력자는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더 큰 시스템의 줄에 달려 있고, 추종자는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그 구조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유리라는 재료는 이 층위를 더 날카롭게 만듭니다. 구조는 완전히 투명하게 보이는데, 그 안에 갇힌 인물들은 그것이 감옥인 줄 모른 채 매달려 있습니다.
백남준 <TV 첼로>
크기가 다른 세 대의 모니터를 플렉시글라스에 넣어 쌓고 첼로 헤드와 테일피스, 현을 붙여 첼로 모양이 되도록 한 비디오 조각입니다. 백남준은 1971년 샬럿 무어먼과의 퍼포먼스를 위해 TV 첼로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백남준이 유명해진 사연은 바로 매체의 층위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TV가 시청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송출 방식을 180도 비튼 예술적 시도였습니다. TV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만들었고, 이는 기계와 인간의 층위, 일방향과 쌍방향의 층위, 보는 자와 만드는 자의 층위를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건축에서 1층과 2층 사이에 1.5층을 만들듯, 백남준은 TV와 악기 사이, 관객과 연주자 사이에 새로운 층위를 창조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AI와 로봇에 대해 느끼는 감정—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협력할 것인가—과 같은 고민을 1971년에 이미 선취한 작품입니다.
백남준 〈My Faust〉
사진의 작품은 1989-1991년 제작된 백남준의 13부작 연작 〈My Faust〉 중 한 점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현대 문명에 빗대어, 인간이 영혼을 걸고 거래한 13개의 영역(Communication, Transportation, Education, Art, Politics, Economics, Religion, Childhood, Nature 등)을 각각 하나의 비디오 조각으로 풀어낸 시리즈죠. 보통 고딕 성당의 제단을 닮은 구조에 모니터를 박아 넣는 형식인데, 사진의 작품처럼 차량 형태를 띈 것은 Transportation(이동·교통) 편으로 분류됩니다.
형태가 말하는 것 — 왜 미니버스인가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시간을 가로질러 그리스 신화의 헬레네까지 만나러 가죠. 백남준은 이 '시공간을 넘는 이동'을 20세기 미디어 환경으로 번역했습니다. 차량은 더 이상 물리적 운송수단이 아니라, 정보를 실어나르는 매개체가 됩니다. 위에 얹힌 위성 안테나가 그 선언이에요. 바퀴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파로 이동하는 차. 1974년에 백남준이 록펠러 재단에 제출한 글에서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미니버스는 그 도로를 달리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입니다.
모니터들 — 시간의 층위
말씀하신 '과거-현재-미래의 동시 재생'은 이 작품의 핵심을 정확히 짚습니다. 백남준 비디오 작업의 영상 소스는 거의 항상:
과거: 본인의 1960-70년대 퍼포먼스 아카이브, 샬럿 무어먼과의 협업 영상
현재: 〈Good Morning, Mr. Orwell〉(1984), 〈Bye Bye Kipling〉(1986), 〈Wrap Around the World〉(1988) 같은 위성 생중계 푸티지
미래: 컴퓨터 신디사이저로 변형·왜곡된 추상 이미지
이 셋이 한 화면이 아니라 여러 모니터에 분산되어 동시 재생됩니다. 관람자가 어느 모니터를 보느냐에 따라 시간축이 바뀌는 거죠. 건축적으로 표현하면, 이 작품은 단일 시점의 원근법을 거부하고 다초점적 시간 구조를 만듭니다. 제우님이 평소 말씀하시는 '층위'가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 적용된 사례라고 봐도 좋겠습니다.
위성 안테나의 의미
위성 안테나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백남준 후기 작업의 핵심 기호입니다. 1984년 〈Good Morning, Mr. Orwell〉에서 그는 뉴욕-파리-서울-베를린을 위성으로 연결해 2,500만 명에게 동시 송출했어요. 오웰이 1984년에 도래할 거라 예언했던 감시·통제 사회를 정반대로 뒤집어, 위성을 해방의 도구로 다시 정의한 사건이었습니다. 〈My Faust〉의 차량 위에 얹힌 안테나는 그 사건의 응축된 기념비입니다.
파우스트적 거래의 양가성
다만 백남준은 마냥 낙관적이지 않았어요. 〈My Faust〉라는 제목 자체가 양가적입니다. 인간은 미디어 기술과 거래해 전 지구적 동시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저당 잡혔다는 함의예요. 미니버스의 표면이 거의 광기에 가깝게 칠해져 있고, 모니터들이 깜빡거리는 그 과잉의 풍경은 —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라고 외쳤던 그 순간의 위태로움을 닮았습니다.
<키스 해링> (19581990)은 1980년대 뉴욕 지하철 빈 광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며 등장한 작가입니다. 게이이자 사회운동가로서 AIDS, 인종차별, 권력 비판을 굵은 선과 상형문자 같은 도상으로 표현했습니다. The Blueprint Drawings는 해링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90년에 완성한, 그의 마지막 연작입니다. 원래 1980~81년에 수묵으로 그린 드로잉들을 17점의 실크스크린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동성애·타자성·죽음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모호한 서사를 형성합니다.
화면은 위·중간·아래의 세 층위로 나뉩니다.
[상단 — 권력과 문명의 층위]
중앙의 검은 실루엣 인물이 빛을 발하는 무언가(배턴 혹은 무기)를 치켜들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해링이 자주 사용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권력자' 도상으로, 군중 위에 군림하는 지배 구조를 암시합니다. 그 아래 피라미드는 해링의 작업에서 고대 문명과 영원성, 그리고 시간의 무게를 상징합니다. 피라미드와 UFO의 병치는 고대 문명, 영원성과 외계적 미래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왼쪽의 기계 장치(컨트롤 패널) 는 다이얼과 화면으로 가득한 기술·감시 시스템입니다. 해링은 기술 문명에 비판적이었으며, 이 기계들은 인간을 통제하고 분류하는 근대 사회의 장치를 뜻합니다. 오른쪽에는 TV 화면 속 동물(개), 원자 기호, 다리미·전화기 같은 일상 기기들이 보입니다. 개는 해링의 트레이드마크 도상으로 위협적 권력이나 맹목적 복종을 상징하고, 원자 기호는 핵 위협과 파괴적 에너지를 가리킵니다.
[중간 — 군중과 연대의 층위]
얼굴 없는 수많은 인물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해링에게 얼굴 없는 인물은 익명성의 상징입니다. 이 군중은 AIDS 위기 시대 뉴욕의 게이 커뮤니티, 혹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는 사회적 소수자들입니다. 일부는 서로를 감싸고, 일부는 빛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이 혼돈은 위협이자 동시에 연대입니다.
[하단 — 죽음과 소멸의 층위]
두 개의 패널로 나뉜 하단에는 땅에 누운 인물들이 있습니다. 점으로 가득한 바닥 위에 엎드리거나 웅크린 이 형태들은 AIDS 바이러스를 연상시키는 점 무늬 위에 쓰러진 존재들로, 전염병으로 죽어간 이들의 은유입니다. 죽음은 화려한 상단의 아래, 군중의 아래, 가장 낮은 자리에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게이와 일반인의 층위 / 예술과 사회운동의 층위
화면을 모르는 채 보면 역동적인 팝아트의 에너지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맥락을 알면 — 1988년 AIDS 진단, 1990년 사망 — 이 작품은 시대의 공포와 분노와 애도가 담긴 유언장이 됩니다. 해링은 복잡한 정치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단순한 선으로 번역했습니다. 갤러리 안에 걸린 그림이면서 동시에 거리의 벽보이기도 한 것 — 그것이 예술과 사회운동 사이에 해링이 만들어낸 층위입니다.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1964~) 는 인도 비하르 주 출신으로 뉴델리에서 활동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용품, 티핀 도시락통, 자전거 등 인도인의 일상 사물을 거대한 조각으로 변환하며 인도의 계급·이주·근대화를 탐구합니다.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Everything is Inside)(2004)는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인도 이주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보내던, 끈으로 단단히 묶인 꾸러미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브론즈로 주조된 짐 보따리들이 뭄바이 택시 지붕에 실려 있는데, 택시는 그 무게에 짓눌린 듯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승과 하강의 층위가 작동합니다. 짐은 삶을 끌어올리려는 희망이지만, 동시에 존재를 아래로 눌러 내리는 중력이기도 합니다. 바닥에 묻혀 버튼처럼 보이는 형태들 — 겨우 윗면만 드러난 그릇과 물건들 — 은 인도 카스트 사회에서 표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존재들의 은유입니다. 완전히 드러나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못한 채 경계선에 걸려 있는 것. 큐레이터 제르마노 첼란트는 이를 두고 "아래로부터 오는 잠재적 힘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굽타 자신도 농촌 비하르에서 도시 뉴델리로, 다시 국제 미술계로 이동한 사람입니다. 상승은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짊어진 무게와 뿌리는 결코 땅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수보드 굽타<퓨어> - 는 굽타가 소의 배설물을 온몸에 바른 채 샤워하는 퍼포먼스 영상입니다. 힌두 전통에서 소똥은 신성한 정화 물질로, 의례적으로 땅과 몸에 바르는 행위가 오늘날 인도 농촌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물로 씻어낼수록 관객은 오히려 '더러워지는' 인간을 목격합니다 — 무엇이 정화이고 무엇이 오염인가, 그 기준이 보는 사람의 문화적 위치에 따라 완전히 뒤집힙니다. 서구의 시선에서 불결한 것이 인도의 시선에서는 신성한 것이고, 우리가 '씻어낸다'고 부르는 행위가 어떤 맥락에서는 신성함을 지워내는 행위가 됩니다. 굽타는 이 층위를 몸으로 직접 통과하며, 가치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도된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라 루카스 <새 종교>
영국의 YBa 작가 사라 루카스는 성적 상징물들을 사용하여 유머러스하고 직설적인 작품들을 제작합니다.
<새 종교>는 붉게 빛나는 네온이 죽음을 상징하는 관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생명과 죽음, 신성과 세속, 사랑과 욕망이라는 상반된 층위들을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놓습니다.
붉은빛은 다층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 열정의 불꽃, 그리고 홍등가의 유혹까지. 관(coffin)이라는 죽음의 형태 안에 생명과 욕망의 색을 채워 넣음으로써, 무절제하고 사랑 없는 섹슈얼리티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신성함의 층위(새 종교)와 세속적 욕망의 층위(섹슈얼리티)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yBa 작가 사라 루카스는 성적 상징물들을 사용하여 유머러스하고 직설적인 작품들을 제작합니다.
타츠오 미야지마 <타임 인 블루>
타츠오 미야지마는 발광 다이오드(LED)에 기반한 첨단 테크놀로지와 동양 사상을 접목한 작업들로 잘 알려진 일본의 미디어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LED 판의 숫자를 활용해 보편적 삶과 죽음, 문화와 같은 동양적 사상을 전달합니다. 여기서도 층위가 드러납니다. 첨단 기술의 층위와 고대 사상의 층위, 개별 생명의 층위와 우주적 시간의 층위가 하나의 화면에서 깜빡이며 공존합니다.
<타임 인 블루> 시리즈의 깜빡이는 숫자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갖는 개별적인 삶의 시간들을 의미하며, 불이 꺼졌다 들어오는 과정을 통해 생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이라는 순환의 층위를 담아냅니다.
흥미롭게도 패널 위의 숫자들 중 0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다는 개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끝없이 순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존재의 층위가 결코 0(무)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는 동양 철학의 표현입니다.
필립 파레노 〈내방은 또 다른 어항〉 (2022)
2016년 런던 테이트 모던 터빈홀 커미션으로 처음 제작된 설치 작품으로, 스크린프린팅된 마일라(Mylar) 재질의 물고기 풍선들이 전시 공간을 마치 물속처럼 유영하듯 떠다닙니다. 헬륨으로 채워진 물고기 형태의 풍선들은 무게 추로 정밀하게 밸런스를 잡아 각기 다른 높이에서 부유하도록 설계됩니다. 갤러리 내 공기 흐름에 따라 물고기들이 움직이고, 관람객이 들고 나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날씨와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 동일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작품은 물고기 풍선으로 구성되며 연어, 빙어, 바퀴치로 이루어집니다.
왜 천장에 붙지 않고 부유하는가 — 물리학
핵심은 중성 부력 조절입니다. 두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됩니다.
마일라(Mylar) 소재 선택 일반 라텍스 풍선과 달리 Mylar는 거의 기체를 투과시키지 않아 헬륨이 오래 유지됩니다. 소재 자체의 무게가 라텍스보다 약간 더 나가 부력 조절에 유리합니다.
무게 추(weight) 정밀 조정 풍선들은 정교하게 무게 추를 달아 특정 높이에서 떠 있도록 맞춥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헬륨의 부력 = 풍선 + 무게 추의 중력이 되는 지점을 찾으면, 풍선은 어느 높이에서도 멈춥니다. 수족관에서 물고기가 부레로 수심을 유지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원리입니다.
공기 흐름 활용 관람객의 움직임과 공조 시스템이 만드는 미세한 기류가 물고기를 수평 방향으로 이동시킵니다. 수직으로는 중성 부력으로 고정, 수평으로는 기류에 맡기는 구조 — 그래서 "헤엄치는" 느낌이 납니다.
작품의 개념
파레노는 "전시를 카메라 없는 영화"로 자주 정의하는데, 이 작품에서 관람객과 물고기 모두 배우가 됩니다. 부유하는 물고기와 공간을 돌아다니는 관람객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둘 다 순수하게 사회적이지도, 순수하게 자연적이지도 않은 존재가 됩니다. 수족관이 물고기를 가두는 공간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갤러리 자체가 수족관이고 관람객과 물고기의 위치가 역전됩니다. 내가 물고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서 함께 유영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보신 것이 맞는다면, 이 물리적 원리를 알고 다시 보면 각 물고기마다 매달린 무게 추의 미세한 차이가 보일 것입니다. 그 디테일이 이 작품의 진짜 공학입니다.
코헤이 나와 <PixCell-Deer>- 박제된 사슴에 크리스털 구슬을 붙여 실재가 디지털 픽셀처럼 보입니다. 구슬이 렌즈처럼 형태를 왜곡해 대상을 정확히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실재와 왜곡의 층위. "본 것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마크 퀸은 YBA 세대 영국 작가로, 인체·정체성·아름다움의 경계를 탐구합니다. 자신의 혈액으로 만든 자화상 <Self>로 주목받았으며, 대리석·DNA·얼음 등 극단적으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합니다.
위 작품 <Kiss>는 선천적으로 팔이 없는 실존 인물 두 명을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입니다. 로댕의 키스를 직접 참조하되, 두 인물은 팔이 없는 상태 그대로 포옹을 나눕니다. 여기서 완전과 불완전의 층위가 겹쳐집니다. 밀로의 비너스처럼 팔이 부러진 채 박물관에 놓인 고대 조각은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숭배되고, 동일하게 팔이 없는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는 '불완전'으로 분류됩니다. 퀸은 이 모순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처음엔 관능적인 키스 장면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각도를 바꾸어야 비로소 팔의 부재가 인식됩니다 — 우리가 평소 장애인의 신체에 먼저 반응하는 방식을 뒤집어놓는 순서입니다. 시리즈명 The Complete Marbles, '완전한 대리석들'은 그 자체로 선언입니다. 완전함을 정의하는 것은 신체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
CI KIM(김창일) <꿈> 시리즈
김창일 회장이 작가 '씨킴(CI KIM)'으로 활동하며 만든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서울 회현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창일은 어느 날 남산자락에 커다란 무지개가 뜬 광경을 목격했고, 소년 김창일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넘어 축적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이로움, 사업가로서의 성공, 컬렉터로서의 안목, 그리고 작가로서의 실험정신... 씨킴의 작품에는 한 사람의 여러 정체성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색과 빛의 실험을 지속해온 작가답게, 몽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은 무지개의 일곱 색처럼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사업가 김창일과 작가 CI KIM, 컬렉터와 창작자, 현실과 꿈... 서로 다른 층위의 정체성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공명하고 있습니다.
전시장 동선 - 좁은 길의 철학
김수근은 말했습니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좁은 길에서는 좋은 이웃과 인사하며 골목을 지나갑니다. 경치 좋은 오솔길도 좁을수록 좋습니다. 반면 물류 이동, 고속도로처럼 나쁜 길은 넓은 길이 좋습니다. 이것도 좁고 넓다는 층위의 개념이 전시의 동선에 잘 녹아 있었습니다.
관람 후
깡통만두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동행자 분께서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저는 다음에 클래식 공연에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오늘 경험한 것은 단순한 미술관 관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과 예술의 여러 층위가 하나의 공간에서 공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